관곡지와 주변 연꽃단지에서 재배하는 연꽃의 은은한 향기


관람시기



7월~9월초순


위치



시흥시 하중동 208번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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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5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대중교통



소사역에서 63,63-1 이용, 부천역에서 61번버스,강남역(6번출구)에서 3200번 버스를 이용하여 동아/성원아파트 정류소에서 정차


자가용




  • 수도권 외곽순환도로 시흥 IC – 시흥시청 방향 – 신천동 – 포동 – 연꽃테마파크 이정표 안내

  • 영동 고속도로 서안산IC – 시청방향 – 연꽃테마파크 이정표 안내

  • 제2고속도로 시흥IC – 월곶방향- 시흥시청 – 목감방향 – 연꽃테마파크 이정표 안내

  • 제3고속도록 연성IC – 부천방향 – 연꽃테마파크 이정표 안내

대표음식



물왕동 연정식, 연쌈밥, 연갈비찜


관광자료



조선전기의 명신이며 농학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1424-1483) 선생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평소 농학 발전에 대해 깊은 연구와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은 세조 9년(1463년)에 중추원 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다. 중국에서 돌아올때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 씨를 채취해 귀국한 후,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에 재배를 해본 결과 점차 널리 퍼질수 있었다. 매년 7월경 관곡지는 연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정경을 볼수 있다. 관곡지 주변에는 연꽃테마파크가 조성되어 있어 관곡지와 함께 아름다운 연꽃의 향연을 제공한다. 연꽃의 개화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한다.


문헌자료



관곡지는 하중동 208번지에 위치한 작은 연못으로서 조선 전기의 유명한 관료인 강희맹 선생 이 명나라 남경(南京)에서 꽃은 흰데 끝부분만 옅은 붉은 빛을 띠는 전당강(錢塘江)의 연꽃씨를 가져다 심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로 말미 암아 지역의 이름을 ‘연꽃고을(蓮城)’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시흥시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더구나 2004년에 관곡지 주변 논에 연꽃을 많이 심어 수도권의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곳이 되었으니, 역사적 유래와 함께 시흥을 홍보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인 1846년에 관곡지를 수리하고 쓴 책이 남아 있어 그 의의를 더하고 있다. 그 책이 바로『연지사적(蓮池事蹟)』이다. 『연지사적』의 저자는 당시 안산군수였던 권용정(權用正, 1844년 11월 6일~1848년 6월 25일 재임)이란 분인데, 이 분은 강희맹의 사위로서 관곡지를 소유하게 된 권만형(權曼衡)의 직계 후손이다. 연성정수장을 지나 물왕저수지 쪽으로 가다보면, 비석 세개가 길가에서 있는데, 그중 1848년에 세워진 비석에 “군수권후용정영세불망비(郡守權侯用正永世不忘碑)”라 쓰여져 있다. 여기에 기록된 권용정이 바로 『연지사적』을 쓴 그 분이다. 권용정은 안산군수로 부임한 뒤, 조상의 사적이 깃든 연못(즉, 관곡지)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잡풀이 무성하여 연꽃을 못 살게 하는 것을 보고 1845년 봄에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을 시켜 연못을 수리하게 하였다. 수리하고 나니 그 해 여름에 다행히 강희맹 선생이 심은 것과 같은 전당홍(錢塘紅) 두 줄기가 자라났다 한다. 권용정은 관곡지를 잘 관리하기 위해 다른 일체의 부역(賦役)없이 오직 관곡지만 관리하는 연지기 6명을 두도록 하고 이 사실을 경기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냈다.『연지사적』에는 그 여섯 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도문(李道文), 황차돌(黃次乭), 김춘복(金春福)?황해금(黃海金)?김만돌(金萬乭)?김삼손(金三孫)이 그들이다. 이 여섯 명은 앞에서 말했듯이 일체의 부역은 물론 군역(軍役)과 환곡(還穀)도 면제받는 특혜를 받았고, 그것이 영구히 계속된다는 증명을 경기도 관찰사로부터 받을 정도로 관곡지 관리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만약 연지기에 결원이 생기면 해당 마을인 하중리의 백성중에서 충원토록 하였는데, 이들에게도 역시 같은 혜택을 주었다. 또 연지기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매를 쳤고(笞刑), 큰 죄를 지으면 쫓아내어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도록 한 조항도 마련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처럼 특정한 곳을 관리하기 위해 지키는 사람을 두고, 혜택을 준예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기 때문에 『연지사적』에 기록된 이러한 내용은 비단 시흥시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쓰는 데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관곡지란 명칭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각종 지리지 및 관곡지의 현 소유주인 안동권씨 화천군파의 족보에는 모두 이 지역을 직곶(職串)으로 기록하고 있고, 실제 주민들도 ‘베실구지’, 또는 ‘벼슬고지’로 부르고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벼슬(베실)’에 해당하는 한자(漢字)를 ‘직(職)’에서 ‘관(官)’으로, ‘구지(고지)’에 해당하는 한자(漢字)는 ‘곶(串)’에서 ‘곡(谷)’으로 바꾸어 표기함에 따라 ‘관곡지(官谷池)’란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관곡지를 잘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 못지않게, 원래의 이름을 찾아 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