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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본국검 출전 그 1& 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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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4-09-11 13:35
조회수: 462
 

본국검 출전 그 1.
본국검의 아직도 그 출전이 분명치 않다.
무예도보통지의 황창랑의 백제왕을 찔렀다는 예는 전설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다면 그 칼은 길이가 짧은 약60 센티의 검이 아니었겠나?
그 근거는 그 어린나이에 긴 쌍수도는 아니었을 터이고 짧으나 전투용의 길이가 되었다고 한다면 월왕
구천의 칼이 길어져 60센티 정도이고 검무를 추었다하면 단도나 비수는 아닐 것이다.
그런 근거에서 약 60센티라고 하는 것이다 약 60센티 정도의 칼이 사적 자료에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방진(方陣)군사학 용어를 보자중 무장 한 보병이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보통 8열종대로 늘어서는 전술대형이다.
이 대형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발한 것으로 BC 7세기에 그리스 전역으로 퍼진 것 같다.
방진을 이루는 그리스의 장갑보병은 둥근 방패, 가죽과 금속으로 만들어진 무거운 몸통 갑옷, 정강이
받이, 2.4~6.4m 길이의 공격용 창,60㎝의 양날 검 등으로 중무장했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 60센티와 월왕 구천의 검 60센티는 당시 편수검의 사용 길이가 그랬을 것이란 추증이 가능
하고 그 추정의 타당성에근거한다면 60센티는 당시 사용 경험상 정리를 하면 이상적 길이였다고  결론
지울 수 있다. 황창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 사실이 전설이 아니라면 60센티 정도 일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동천왕시절 유유가 위나라 장군에게 식기에 칼을 숨겨 들어간 것은 비수 정도이지
60센티의 칼은 아니었을 것이란 말을 덛 부친다. 일본 검도형의 소도의 편수검 존재도 풀어야 할
숙제다. 그러한 연유로 확실한 본국검 출전을 시급히 밝혀야 할 것이다.


본국검 출전 그 2


1.19년 532년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왕비의 세 아들 장남 노종 차남 무덕, 막내 무력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해 왔다.
 이에 왕이 예로써 맞이하여 그들을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어 그 본국(本國)으로 식읍을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이 각간에 이르다.  
 이때 본국은 망한 가야가 그대로 가야라는 국명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대로 본국이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2.삼국사기 권4 진흥왕 12년(561) 권32 악지 가야금 조에 가실왕이 있다. 가실왕은 유일하게 중국왕조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 함 으로써 남제서” 권58. 가락 전에 기록 되어진 가라국왕 하지(荷知)이다
 이에 의하면 하지는 건원 원년(479)에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輔國將軍) 本國(가야국)왕의
 칭호를 얻는다. 가실왕은 가야금을 제작 했다. 이때 가야는  본국이란 국명을 얻는다.
 굳이 멸망한 가야가 가야라는 국명을 사용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본국검 과 중조류(中條流)
 본국검은 편수검(片手劍)이다 놀랍게도 일본의 그 흔적이 있다 쌍수도법이 발달한 일본에서 편수도법
 이 중조류(中條流)가 있다.
 중조류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무사와 쌍수도의 대가와 싸워 편수가 이기는 기록이 있다.
 이 중조류의 원조가 누구인가 어떻게 해서 일본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일본 검도형에 존재하고
 있는가?
 또한 본국검의 편수임에 우리는 그 확실한 연관성에 흥분한다. 다만, 가야에서 건너간 것인가 신라에서
 건너간 것인가는 다음문제이고 가야 본국검이 신라로 와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확실한 증거가
 그 중조류의 편수도법의 존재현상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뒤로 미룬다,


4.본국 검이 멀리 당나라에 까지 퍼지고 일본에까지 흘러갔다는 설을 뒷받침 하는 부분은 신라의 장수들이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한 사실이다.
 일본에까지 보급 되었다고도 한다. 그런 개연성이 있는가? 그런 개연성은 분명히 있다.
 개세의 무장 장보고. 정년. 그리고 명장 설계두. 신라왕자 김인문 등등 당나라에서 무명을 떨친 장수들
 이다. 그들은 무슨 실력으로 무명을 떨쳤을까?
 당나라 무령군 장교 장보고는 당 고종의 명을 받고 4로 지병이 치청대국을 칠 때 그 남쪽을 담당하여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세워 55년간 버틴  치청대국은 그렇게 멸망한 것이다.
 이정기도 만만치 않은 무장인데 당나라에서 신라에서 간 장군에게 그 큰 역할을 맡겼다면
 장보고의 신라, 가야검법인 본국검의 실력이 대단했다고 할 수 가 있다. 그의 동료 정년은 오히려
 장보고 보다 한 수 위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무력이 높았다.
 또한 설계두는 신라사회의 계급의 차별이 심해 당나라로 가서 무명을 떨친 장수다.
 그는 안시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다. 그의 주검을 전해 듣고
 당태종이 크게 슬퍼하면서 장례를 치른다. 숙위로 끌려 같던 왕자 김인문도 백제멸망의 결정적 전투인
 백강 전투에 소정방과 함께 출전하여 완승을 한다.
 그리고 뛰어난 무장 김유신은 고구려 적진을 세 번이나 들락날락 할 정도의 위대한 장군인데 그 아들
 김삼광과 김원술 에게 심혈 기울여 검술을  전수해 주었을 터이고. 장남 김삼광 역시 당나라 숙위로
 끌려가 있었다. 이들이 남의 나라 당나라에서 무명을 날렸음은 당나라에서 검술을 배운 것이 아니고
 신라에서 이미 잘 다듬어진 장군들이었다. 그 검술이 당나라 전투에 이용되고 그 검술이 그 유명한
 가야 본국검일 개연성이 지극히 높다고 하겠다.
 또한 일본으로 간 신라 가야 검풍이 신라사부로 라는 신라 검술계통의 신라사부로를 탄생시켰을 개연성
 이 전혀 없지 않지만 현재 학계에서의 논란중이라 이 부분은 자제를 하려한다.
 그러나 소도의 명가 도미다 세이껭의 원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신라사부로가 나타난다면 또한 큰 수확
 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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