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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 3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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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8-07-0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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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당시 경북 검도 계 균열의 숙명적 원인)

     

당시 정태민 선생님과 남정보 선생의 앙숙지간의 관계는 아랫사람들이 퍽 난처한 상황이었다. 남정보 선생은 1913년생으로 정태민 선생과는3년 차이로 정태민 선생이 1916년생이다.

     

일본 사가 중학에 다니신 남정보 선생은 오아자유지(大麻勇)선생(일본최후의 10)의 제자요 전통 고급 검도 지식과 검도 실기를 익히신 분이다.

해방 당시 몇분 안되시는 일제 강점기 4단으로 알고 있다. 그 상당한 증거는 확인한 정도라   믿고 있다. 해방 당시 5단이 서정학, 아종구, 호익용, 세분으로 알고 있고 4단이 전북의전승호선생과 경북의 남정보 선생 두분 정도로 알고 있다.

     

남정 보선생은 경북 영양이 고향으로 사업 수완도 없는 바가 아니다 목재소도 경영하고 남영 인쇄소도 운영하고 검도 외로 눈길을 돌릴 줄 아는 일찍이 검도 외의 생계를 구상하던 그 당시로써는 꽤 영리한 처신의 인물이었다.

     

대개의 다른 분들은 거의 변통수 없이 검도에 매달려 구차한 생계에 매달리는 생활 들이었다.

     

대개 당시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입장들이었다. 남정보 선생 역시 일제시대 일본 명치 대학을 나온 드물게 좋은 학벌로 경찰에 투신했고 소위 학사 순경으로 경찰에 몸담고 있었다. 당시 대구 사회의 한국인으로 검도고단자로 인식되는 분은 정태민 선생보다 남정보 선생이 더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해방을 맞고 다시 경찰에 투신하여 경감까지 진급하고 6,25때에 공비 토벌 전투 중 오른손 부상으로 평생 강한 검도 연습을 못 하셨다.

     

수련을 하는 필자 등 수련생들도 연습 중 선생님의 오른 손목을 강하게 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유연한 검 풍은 아찔아찔한 공격기술이 있어 깜짝 깜짝 놀라게 했고 해박한 그의 검도 지식은 지금도 머리 숙여지는 고급지식이었다.

     

그리고 그 풍부한 검도 지식을 밑천으로 연출하는 남정보 선생의 재미있는 검도 연기는 지금도 구경할 수 없는 대단한 볼거리 연출이었다.

     

남정보 선생의 증언으로는 정태민 선생이 일제시대 3단 이었고 김영달, 도호문 선생이 2단이었다고 말씀하시었다. 해방 당시 남정보 선생이 31세 정태민, 김영달 선생이 28, 도호문 선생이 24세였으니 설득력 있는 증언 같다. 정태민 선생은 원래 유도 2단으로 김천 경찰서 근무하고 있을 때 남정보 선생이 불러내어 검도로 전향시켰다고 말씀하시었다.

     

결국 검도 입문은 남정보 선생이 먼저 시작했다고 했다. 그 사실에 비추어 설명한다면 당시로써는 엄격한 검도 세계에서 위상은 남정보 선생이 훨씬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 검도 회에 사환 비슷하게 근무하던 배성도 선생은 남정보 선생을 상전처럼 보시던 상관관계 였을 것이다.

     

배성도 선생이 검도 회에 근무하면서 익힌 검도 실력 역시 일본인에게 강하게 배운 좋은 검도였다. 그러나 그는 경찰에 투신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고 남정보 선생은 사업 때문에 잠시 검도를 떠나 계셨고 정태민 선생은 즉시 중앙 서정학 선생을 찾아뵙고 대한 검도회 결성의 초기 멤버가 되었다.

     

이때 해방 후 한국 단 5단을 먼저 승단하고 남정보, 배성도 선생은 뒤에 승단한 그 애매한 사건이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앙숙이요 견원지간의 관계가 되었다. 팔을 다친 남정보 선생보다 건장한 체구의 정태민 선생은 유연하다기 보다는 그 전투성 짙은 검풍은 시합, 즉 선수로써는 사나울 정도로 시합에 능한 분 이셨다.

     

더욱이 그 당시로써는 단 한명도 사용하지 않은 양손 찌름, 한 손 찌름을 특기로써 구사하시던 분이다. 정리를 하면 내가 불러내어 검도를 시작한 너는 내 후배가 아닌가?”하는 남정보 선생과 비록 그렇다하나 내가 너보다 5단을 먼저 승단했으니 현실적 기준은 내가 너보다 우선한다.”하는 식의 갈등은 끝없는 분쟁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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