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검도회관 ::

제목: 제 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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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7-01-19 11:25
조회수: 313
 

33

     

1959616일 화 맑음

     

오전 11시 반 차로 하구(下邱 - 대구로 내려왔다는 말).차로() 대구시가 행진하다.

한미회관서 환영 연회

대구 매일 신문, 대구 일보 사 방문하다.

     

     

참으로 옛날이야기다. 전국학생대회 우승했다고 대구 시가지를 카퍼레이드 했다고 하면 이즈음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만큼 당시 운동 경기가 이즈음처럼 빈번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한국 세 번째 도시 대구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하면 제1회 학생 대학부 우승은 큰 영광이요, 한국 검도 역사상 최초, 최고의 기록이다. 더욱이 주장으로써 한 포인트 잃지 않고 전승한 필자의 만족과 기쁨은 비할 바가 없었고 이런 분위기에 깊이 젖어 오늘날까지 검도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1959617일 수 맑음

     

경찰국장에게 인사하고 대구 대학 이우창 학장님께 인사드렸다. 컵과 우승기를 봉납했다. 이순영 사범님 댁 가서 인사하고 저녁 때 향촌동 향미에서 연회 참석했다.

     

이 시절만 해도 경찰국과 유도 검도 도장은 밀접한 관계였고 주로 경찰국 상무계와 연관되어 경찰 무도가 한창 성황을 이루고 있던 시절이다.

대학 검도부가 경찰 국장에게 우승 인사 방문은 이즈음은 상상도 못할 퐁속이었다. 그리고 2-3일 간 연달아 큰 축하연을 열어주곤 했다. 지금도 용인에 계시는 이순영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예를 갖추고 찾아뵙는 필자에게는 마지막 남아계시는 검도 은사(恩師)이다.(2014년 현재-2015년 이순영 선생님은 별세하셨다.)

     

1959618일 목 맑음

     

상무 가서 운동했다.

     

전국대회 우승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필자는 즉시 훈련에 복귀했다. 필자의 훈련 방법이 특이하다면 우승했을 때 더 훈련의 강도를 연장 연계시킨다. 만일 패했을 경우 충분한 휴식을 꽤 오래 취한다. 우승 분위기 때의 훈련과 패배 분위기에서의 훈련은 효과의 방향이 정반대라는 훈련철칙이 이때부터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선수지도의 방법으로 택하고 있다.

     

1959622일 월 맑음

     

..... 상무 갔다. 정태민, 남정보, 배정도, 이순영, 신성 선생 등과 운동했다.

     

이즈음은 지도자 1명에게서 많은 선수들이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필자에게는 이처럼 아득한 대 선생님이 여러분 계신 터에 그 집중적 각 선생님들의 특성을 익힐 수 있어 경북 검도가 그래서 막강했고 정태민 선생님이 전국의 어느 선생님보다 우승을 가장 많이 시키신 선생님이시다.

정리를 해보면 최초의 전국 체전 일반부 시합 1955년도 우승을 기점으로 전국 체전 7연패를 했고 1956년부터 시작된 전국 체전 학생부 2년 우승을 경북고등이 했고 제1회 학생 대회에 경북 대구대학이 우승을 했은즉 도 사범 정태민 선생님의 지도 실력을 가히 쌍을 구할 수가 없었다. 승부욕 강한 경남의 도호문 선생이 항상 샘을 내고 있었고 충북의 이교신 선생이 또한 승부욕 강한 선수였고 지도자였다. 그 후 제1회 세계 대회 감독이 정태민 선생이었고 선수가 도호문 선생이었다. 이 후 필자는 정태민 선생님의 가르침을 오늘도 잊지 않고 있다. 그 다음 이교신 선생의 제자 김춘경, 오세억 등을 배출한 사례 우연한 일은 아니다.

     

     

1959624일 수 맑음

     

..... 남정보 선생이 검도교범책값을 수금해 달라 하셨다....

저녁 상무 가니 유도 지준달, 최종철, 장범용 사범 세분만 남고 강력반 직원들은 재선거구 월성 을구로 갔다가 오늘 돌아왔다. 저녁 상무 갔다 오는 길에 17일자 대구 매일 신문에 기사화된 혈액은행서 피 판 돈 뺏긴 사람이 나를 잡고 밥을 좀 달랬다. 무술회 까지 가서 정태민 선생님 댁에 가서 남은 밥 얻어주었다.

     

자유당 말기 부정 선거 만연할 때 이때 강력반 형사들인 검도 유도 사범들은 부정 선거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 이 시절만 해도 가난한 시절이라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했다. 오죽 배가 고프면 자기 피를 팔아 밥을 사 먹으려고 했을까? 어느 불쌍한 사람이 피를 팔아 나오는 순간 그 돈을 강탈당했다 자기의 신문기사를 내게 보이면서 배고픔을 하소연하기에 하도 딱해 정태민 선생님께 가서 밥을 얻어 먹였다. 그때만 해도 인심이 후해서 그런 풍습이 있었다. 해방된 지 14년 후 6.25 사변 9년 후의 상황이었다.

     

1959627일 토 맑음

     

오전 상무가서 제1회 경북 학생 유도 대회 관람했다. 개인전 우승은 채일포 군, 준우승 윤창희 군, 고등부 단체전 영남고 우승, 준우승 부고, 대학은 경북대 우승, 경북대의 김주현 군의 후배 이우식에게 참패하는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다. 언제고 나도 저 꼴이 될까 두렵다.....

     

우승의 채일포 군은 장사라 할 만큼 힘이 좋아 이후 씨름계에 진출하여 이름 날렸다. 준우승 윤창희는 대통령 친람 무도 대회 고등부 우승자의 실력자로 현재 미국에 살고 있고 뒤에 경북 유도 도사범 신치득 선생의 사위가 된다. 김주현 군은 필자와 함께 1957년 대통령 친람 무도 대회 준우승한 뛰어난 선수건만 일 년 후에 이우식에게 패한데 대한 필자의 충격은 컸다. 이우식은 당시에 굳히기 기술은 당할 자가 없던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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