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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 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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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7-01-0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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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1959611일 목 흐림

상무 가서 호구 묶어 역전 파출소에 맡겼다.

614일 시합출전을 위해 역 가까운 파출소에 맡겨 두었다가 출발 당일 기차에 편리하게 싣기 위해 시합 출발에 앞서 찾아가곤 하던 것이 이 시기 의 풍속이기도 했다. 이즈음처럼 자가용이 많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해서 그런 편리함을 이용했다. 경찰과 유도, 검도종목의 특수한 관계상 그런 편리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1959612일 금 맑음

역에 가니 서용석 군과 윤정길 군이 나왔다. 출전비가 학교에서 나오지 않아 갈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정태민 선생님과 신성 총무가 경북고등에 갔으나 출전비가 나오지 않았다.

     

2016년 현재 서용석 군은 4.5년 전에 타계했고 윤정길 후배는 생존해있다. 윤정길 선수는 1959년 대통령친람 무도대회에서 준준결승에서 전영술을 꺽고 결승에 올랐던 선수로 참으로우수한 선수였다. 이때에 윤정길이 고 3이고 전영술이 고1 이었다.-

     

기어코 경북고등 선수는 출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유도대가(柔道大家) 이선길 선생 생신이라 접대를 받았다. 고광찬 심홍보 김봉조 세분의 형사가 3천환을 주어 선수들 남포집서 식사했다.

이 기념비적 첫 학생대회에 절대 우승 후보인 경북고 등 불참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1956, 57년 전국 최초 학생부 우승을 기록한 경북고등이 전력을 가지고도 출전이 불가하여 우승의 기회를 놓치는 경북고등의 입장을 살펴보자 당시 필자의 2년 후배들인 경북고등 선수들의 검도부원들은 다음과 같다. 현승일(전 국민대 총장. 국회의원) 박철언(전 체육부장관 법무부장과 국회의원) 허봉열(서울대 병원의사) 박경팔(전 삼성전자사장) 도재승(전외교관)등 학업의 충실을 우선하는 학교의 검도부원들이었다. 예부터 남북한 통 털어 경기고보 (전 경기고등) 평양고보 대구고보(경북고등의 전신)이 한국 3대 명문고였다.

동남쪽 지방의 명문으로 지방 학교로써 보통 서울대학에 200~300명을 보내는 학업 위주의 학교에서 체육선수의 대회출전은 당시로서는 뉴스가 될 만한 사실이었다. 그런 학교였다. 슬프고 억울함은 필자의 안타까움일 뿐 특히 승부욕 강하신 정태민 선생님의 안타까움은 필자의 안타까움과 같았을 것이다. 시합 출전에 협조한다는 뜻에서 아마 세분의 경찰 검도인인 고광찬 심홍보 김봉조씨의 협찬은 참으로 고마웠다. 처음 입문할 때 다소 필자보다 일찍 시작한 분들에 고광찬 김봉조 심홍보 세분들이었다. 이 세분이 박봉을 털어 우리 학생선수들을 위해 협찬했던 것이다. 속칭 양키시장이란 곳에 위치한 당시 이름난 식당에서 즐겁게 식사했다는 기록이다. 이날 이순영 선생의 부친이신 한국 유도계 전설적 대가 대가이신 이선길 선생의 생신 초대로 가서 훌륭한 접대를 받았다는 기록도 함께 있다.

이즈음 최순실(201612월 현재)딸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학관계로 떠들썩한 판국에 학업을 위해 우승의 실력을 가지고도 출전을 불허한 경우는 지금 생각해도 필자에게는 무한히 억울한 사연이었다. 당시로서는 일류하교라 자처하는 경북고등으로써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경북고등 검도부의 우승은 멀어지고 그 훨씬 뒤 고교 평준화 이후 경북고등 검도부가 명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당시학교의 그런 처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1959613일 토 맑음

출발 9시 반차로 선수 일행은 차에 올랐다. 차중에서 경남선수들 만났다. 국제 결혼한 아줌마와 심심찮은 말벗으로 차중에서 시간을 보냈다.

     

2시경 도착 경보예관에 들었다.  유도 부는 봉황예관으로 갔다. 무엇보다 체육부장 박성재형의 물심양면의 협조가 고마웠다.

     

이때 차중에서 만난 차복순 이란 미모의 여인은 어린 딸 낸시와 함께 그 여인의 인생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로맨틱한 감정으로 오수의 잠꼬대란 글을 지방신문에 투고하여 활자화된 일이 있다.  그만큼 오랫동안 향기처럼 기억되던 미모의 여인이었다. 이런 글을 읽어 볼 리 없지만 언제 한번 만나는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959614일 일 흐림

     

택시로 시합장소 서울 중, 고등 강당으로 갔다.  서정학 대회장 축사에 이어 드디어 대망의 제1회 전국학생 검도대회는 막을 열었다. 첫 게임은 신흥대학: 대구대학에 선봉 부장이지고 2위 중견이 이겨 2:2 주장 전에서 필자가 이기고 다음 대구대 : 경남팀은 이위만 지고 4:1의 스코어로 이기고 다음은 각도 주장 7명과 서정학 선생 지도대련에서는 평소 단련한 실력을 과시하는데 혼이 났다. 대구대 : 전남 대전에서는 중견만 패하고 4:1로 이겼다. 결승전 경북대 충북은 지난날 부산 전국체전 시 고등부 결승전 시합을 방불케 했다. 선봉중견이 패하고 2:2 주장서 필자가 이겨 우승했다. 중등부는 전주중 고등부는 서울경동고 대학부는 대구대학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개인상은 신흥대학 주장에게 갔다. 4전 무패인 전적을 올린 필자만 억울했다. 예상외로 대학부는 신흥대 부산대 청주대 대구대. 전남대 서울대 성균관대 7팀이었다.

     

이미 설명한바 있지만 1959614일 제1회 학생 검도대회 기념사진이다 앞줄 제일 왼쪽이 필자보다1 3연장으로 하얼빈의 호랑이라고 불렸던(하얼빈 중학 이사선생 1년 후배였던 전동욱선생의 증언)이사길 선생과 네 번 째 검은 도복의 필자는 물경 30~40분간 싸웠다.

     

필자생애에 가장 힘든 시합이었다. 당시의 필자가 20세 이사길 선생이 33세였다. 그때에 신흥대학은 경희대 전신으로 나이든 유명 체육선수가 많았다. 신흥대학 주장으로 출전하여 필자와 잊지 못할 대전(大戰)을 하였다. 몇 년간 성남고등 인천체전 등지에서 지도하시다가 행방이 묘연했다. 금년 봄 조치원서 초등학교 검도 대회에 구경 왔던 차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그냥 돌아가려다 평소에 필자에게 늘 얘기들은 도성기군이 이사길 선생 사시는 동네를 알아 114에 물어 46(2005) 만에 찾아갔다. 공주 어느 산자락에 독거노인이 되어 혼자 쓸쓸히 지내고 계시었다.

     

"여보 그때 우리 한 세 시간 싸웠지?"

이 선생은 우리를 시합이 길었다는 기억을 세 시간으로 알고 계시었다.

검도인 으로 누가 서정학 선생님을 잊고 있는가? 바로 이 제 1회 학생대회도 서정학 선생님이 일선에서 활약 하실 때의 일이고 몸소 호구를 입으시고 대회 중간에  최고 기량의 대학 주장을 뽑아 자신 있게 7인 대련할 분이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없다. 그만큼 선생님은 최고의 실력자요 검도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제 1호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그 선생님의 말로를 보면서 누가 그 원흉인가? 치가 떨린다. 그때 7명 중에 필자가 다시 주장으로 나간다. 맨 마지막에 출전해서  주장중의 주장답게 맹렬한 공격 일변도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꼭 죽을 것만 같았다. “그만말씀하시기를 기다리는데 마지막에 상단을 취하시는 것이었다. 실은 상단은 가끔 남정보선생과 대련한 일이 있지만 참으로 틈이 없었다. 마치고 뒤에 쓰러져 누워있는 필자를 보신 정태민 선생님이 결승전 앞두고 무슨 힘을 그리 빼노?” 하시면 핀잔을 주시었다. 하긴 부장으로 뛴  청주대학의 오세억은 결승전을 앞두고 힘을 쏟지 않는 공격을 했다. 그렇게 결승전에서 맞붙은 필자는 다시 2:2의 스코어에서 주장 전으로 넘어와 오세억과  맞붙게 되었다. 지난번 고등부 때에 2:2 주장 전 에서 필자가 이겨 우승한 후 다시 대학부에서 2:2 주장 전 에서 우승을 했다. 그러나 이 시합에서 정말 기막히게 기억에 사라지지 않은 부분은 신흥대학의 주장 이사길 과의 시합이었다.

     

이사길 선생은 그 해(1959) 3월 서대문 형무소 도장에서 행한 서울 3.1절 대회 시 지나가다가 우연히 둘러 본 후 다시 검도를 시작한 분이다. 당시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 팀으로 출전한 것이다. 그와 주장 전에서 약 30-40분간 싸웠으나 당시 단심제(單審制)였던 관계로 심판인 도호문 선생이 시합을 중지시키고 너무 오래 끄니 가볍더라도 한판 준다고 선언하고 다시 시합을 재개하자 죽도치고 머리를 쳐 이긴 기억은 평생에 가장 힘든 시합 중의 하나였다. 그 만큼 이사길 선생의 칼은 최고의 발랄함을 자랑하던 당시의 필자가 혼이 날 정도의 대 실력가였다. 필자보다 당연 연장이다. 최근(2005) 46년 만에 소재를 알고 그가 칩거하고 있는 공주 어느 시골에 찾아가 뵙고 왔다. 퍽 반가웠다. 경북고등 우승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안타깝고 고등부 우승의 경동고 김택준은 현재 8단이 되어 이태리에 살고 있다.

     

이때 김춘경이 고3이고 고규철이 고2 이고 전영술이 고1이었다.

1959614일 불같이 다투던 그 모습은 사라지고 필자도 초로의 모습이 되어 팔순으로 향해가는 시기에 옛 얘기를 쓸쓸히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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