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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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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6-04-1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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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당시 경북, 대구 검도와 유도와의 관계 및 그 행적

     

50년대 중, 후반 그 당시 유도의 면모를 살피면서 유도, 검도의 친숙한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그처럼 가까웠던 두 종목은 오히려 무도의 분위기를 발전으로 향해가는 촉매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소위 경찰무도라는 치안 유지책은 일제 강점기부터 유지되어 오던 문화정책으로 이즈음의 경찰무도는 태권도, 합기도 등도 포함되고 정작 우리 씨름은 빠져있다. 철저한 일본무도 문화의 정착위에 또 다른 일본무술을 더 첨가한 셈이다. 총기사용이 허락된 시대에 무술의 필요성이 아직 있다고 하지만 일본 전통의 경찰무술 문화를 재조정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유도의 그 여세를 닮은 경북, 대구 검도계도 일반부 7연패와 학생부 최초의 고등 대학부 전국 재패의 기념비적 기록을 남기었다. 그때 학생부 주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한 필자의 검도 인생은 선수로 출발한 그 갑년(2016년 현재)을 맞은 것이다, 박성재형은 인디아나주에 거주하며 명망 높은  체육교수로 재직하고 이후 퇴직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유도 인물들을 부연하자면 권용우 이석도선생은 당시천하무적의 현역선수였고 이석도선생은 대통령 친람무도대회 5연패로 상부의 조정으로 선배인 권용우 선생이 출전하여 또한 우승을 하였다. 웬만하면 선배로서 신치득 선생이 권하더라도 출전을 하지 않을 것이나 자존심 버리고 순순히 복종한 그 모습은 참 귀감이 될 만한 태도라 할 수 있었다. 우승하고 돌아온 후 파티장 에서 개인 불만을 토로하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특히 지나 칠 수 없는 사실은 미주로진출한 유도 인들이 오늘날 세계유도를 이처럼 발전 시켜 논 공적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미주로 진출한 사범들은  그 이전 우리연령대의 스승일 수 있는 대구 출신의 거물 신도환 선생이 있었고. 네델란드에 진출한 최인도선생이 있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서 김위생 황인수, 신봉열, 정영남, 박영환,윤창희,신창식,정영진,윤중희등이 있었고 독일에 진출한 윤복균, 정이수가 있었으며 윤복균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있다가 귀국했다. 윤상진은 프랑서에 진출 했다가 귀국했다.

모두 다 출중한 인물들로서 황인수씨는 필자가 한국 최초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한 1967년도 동경에 간 기회에 극진회관 가라데 도장에 갔더니 최영희씨는 중남미 순방 중에 이런 분을 알게 되었는데 아느냐고 물어 면서 그가 보여 준 사진이 황인수씨였다. 그는 나에게 미주 진출 의사를 강하게 타진해 왔다. 사정상 진행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 이후 미주의 유도인 민경호 교수가 또 한 번 미주 진출의 의사를 타진해 왔으나 역시 당시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오아주의 구우(舊友) 김정은 씨의 요청으로 검도인을 소개 해 달라 해서 워싱톤에 거주하는 제자 전종근(인천체전 6회 주장, 김제휴와 동기)을 추천 해주어 그와 함께 미주 검도보급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는 최초의 미주 검도강의를 그들을 통해 개설하고 조선세법도 시연 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꽤 오래된 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렇듯 유도 인들은 대거 해외 진출의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것이 유도, 검도의 발전 차이였다. 이미 유도는 이미 1985년에 박종학이 일본을 꺽고 세계재패를 한지 오래다.  이 무렵 가끔 대구 고향을 방문 하는 재경 유도인들 중 김위생 씨를 비롯한 그 일행 중에 김종달 김정행 씨 등이 함께 내려왔다. 김정행 씨는 승승장구하여 용인 대학총장, 대한 유도회 회장. 대한 체육회 회장 까지 올랐다. 신봉열씨는 바로 유도 도 사범 신치득 선생의 차남으로써 형, 아우들 까지 초청하여 미주로 이주했다. 정영남. 씨는 필자와 경북 중, 고등, 동기 동창으로서 학업 위주의 학교에서 빛을 못 본 실력자였다. 그의 아우 정영진은 전국대회를 여러 차례 우승하고 연대 유도부를 빛낸 인물이기도 하다. 김인덕은 1958년도 대통령 친람 무도대회에서 학생 대회 우승자이다. 이미 오래전 지병으로 타계했다. 필자와는 대통령 친람무도대회에 동행했던 사이다. 필자는 2연속 경북 학생 검도대표로 출전했기 때문에 동행했다는 뜻이다. 반성호는 대개 대구 유도명문 계성 고나  영남 고등이 아니고 대륜 고등 출신으로 유도대학에 가서 큰 발전을 본 사람이다. 역시 일찍 타계 했다. 윤창희는 고등학교 때 김인덕에 이어 다시 대통령 친람 무도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고 그 동생 윤중희도 뛰어난 기량의 선수였다. 특히 윤창희는 신치득 선생의 사위로 미주에 진출한 사람이다. 윤복균 윤수균. 정이수. 세 사람은 다 영남대학 출신으로 윤복균, 윤수균 두 형제는 발군의 실력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유도 인이었다. 윤복균은 일찍이 독일로 진출하여 지도 하다가 미국으로 옮겨 활약했다. 필자와는 가까운 사이로 독일로 미국으로 필자를 초청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여러 사정으로 무산된 아쉬움이 있다. 만약 필자가 미주로 갔다면 다른 각도에서 한국 검도 발전을 도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정이수는 좀 별난 공격형 유도로 경기대학에 지도하다가 독일로 가서 지도하면서 독일에 정착한 사람이다. 별나게 필자를 따르는 후배이기도 하다. 경북대 사대 체육과에 김주현은 필자와 함께 검도, 유도 밖에 없던  대통령 친람무도 대회에 학생부로 함께 출전한 기록이 있다. 체급이 없던 시절에 거구 한호산과 결승전서 맡 붙어 연장, 무제한에서 판정패 할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다. 그 한호산은 일찍 네델란드로 진출하여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대로 독일에 정착하여 독일유도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김주현은 일찌감치 대한 통운 유도 팀에  입단하여 유도를  일찍 접고 탄탄한 생활기반을 다져 현재 아주편한 노후를 즐기고 있다. 김봉길은 체구도 우람했거니와 실력도 있는 친구였으나 불행하게도 상급생의 기합 주먹에 작고한 사람이다. 이렇듯 경북 대구 유도가 검도와 함께 한국천하를 호령하고 유도는 1985년 박종학이 일본을 꺽고 일본제압을 벌써했다. 검도는 아직도 일본 제압의 길이 열리지 않은 채 1970년 세계대회이후 단체전 1회 개인전은 단 한 차례도 우승 못한 처참한 현실에 있다. 검도 유도는 가장 친밀하게 함께 출발하여 함께 수련하던 초기 유도, 검도 분위기 때문에 필자는 별나게 학생 및 일반 유도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는 셈이다.

     

당시 검도 학생부 선수 출전 각자의 오더(order-포지션)는 필자가 짰다.

특히 이순영 선생께서 항상 자율권을 강조 하시면서 필자에게 짜보라고 늘 지시 하셨다.

그 때부터 현재까지 필자는 선봉부터 주장까지의 포지션마다의 각각 틀리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선봉은 이렇다 중견은 이렇다 주장은 이렇다. 라고 꼭 꼬집어 얘기는 못해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다. 평생을 시합에 선수를 데리고 다녀도 한 번도 비굴한 승리를 위한 선수위치 장난은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김재일 하면 선봉부터 주장까지는 아예 공개적으로 짠다. 그래서 상대가 필자의 출전 진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번에는 선봉을 누구를 내 세우고 2위를 누구를 내세우고 다음에는 선봉을 다른 사람을 내세우고 2위를 바꾸고 하는 식의 편법을 쓰지 않았다.

각 포지션마다 독특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 특성에 맞게 시합을 해왔다.

또 하나의 이유는 누구라도 덤벼 보아라. 나는 실력으로 할 것이지 선수 위치를 바꾸어 가면서 이기고 싶지는 않다는 자존심 지킴이요. 당당함을 보이고자 하는 필자의 기질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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